지그문트 바우만 유동하는 공포 레포트 독후감 :: 파놉피콘 디스토피아
감시, 그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를 읽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가 직면한 공포는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 지난 학기 전공 수업시간에 보았던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이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이 영화는 동독의 국민이 비밀경찰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철저하게 조사 당하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며, 사상적인 작품을 쓴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인 여배우 크리스터를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게 된 비밀경찰 비즐러의 삶을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극작가인 드라이만이 하는 모든 말은 녹취되고 도청되며 그의 생활은 하루 24시간 철저한 감시를 당한다. 전반적인 줄거리는 냉혈한 비즐러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드라이만과 크리스터의 낭만과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하게 되고, 결국 드라이만이 서독 언론에 동독의 반인권적 행위를 고발하는 글을 투고하는 행위를 묵인하고 그의 죄를 숨겨준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동독의 철저한 감시체계에 공포를 느꼈다. 사회주의의 강력한 권력과 그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한 개인의 생활을 100% 감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극심한 공포로 다가왔다.
국가권력의 감시에 대한 공포는 [1]조지 오웰의 『1984년』이라는 책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984년』에서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존엄성이 박탈된 사회주의 국가를 통해 [2]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그려냈다. 소설의 배경은 전 세계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그리고 동아시아로 분할된 1984년이다. 오세아니아의 런던에 살고 있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쌍방향 화상 장치로 인해 24시간 감시 당하는 삶을 산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당원이 하루 24시간, 도청과 감시 속에서 살아간다. 텔레스크린은 사무실이나 각 가정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모든 당원들의 일상을 제약하고 관리한다. 당은 텔레스크린이 없는 곳에는 순찰기, 사상경찰 등을 동원하여 감시체계를 공고히 유지한다. 윈스턴 스미스는 단 한순간도 빅 브라더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사회에서는 사생활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건물의 벽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주인공의 주요 업무는 빅 브라더의 예언이 적중한 것처럼 보이도록, 지나간 잡지나 신문의 정보의 수치를 조작하는 일이다. 심지어 당에서는 혁명 이전시대의 기록을 부정적으로 조작하거나 아예 인멸함으로써 체제전복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철저한 노력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언론 조작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국민의 물질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사고활동마저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로 가득 한 감시사회”의 모습이 2009년 대한민국의 초상이 아닐까 하는 씁쓸하고도 무서운 의문이 머리 속을 스친다. 소설에서는 조금 더 극단적이고 적나라하게 표현되었을 뿐, 현대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감시의 본질과 목표는 소설 속의 모습과 동일하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그러한 국가 권력의 감시가 개인에게 무력감과 불안을 심어주고 공포를 조성한다는 사실 자체도 변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하루에도 40통이 넘는 스팸 메일이 메일함에 쌓이고, 원치 않는 신용담보 대출문자가 휴대 전화로 날아오며, “CCTV”로 재현된 텔레스크린이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녹화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의 사생활이 얼마나 쉽게 노출되는가를 보여준다. 동시에, 우리의 일상 속에 “감시”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스며들어 있는지를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공포는 액체와도 같아서 쉽게 흐르고 그 모양도 쉽게 변하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의 일상에 쉽게 침투한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감시사회의 가능성은 이처럼 우리가 사는 현실 곳곳에서 드러난다. 감시로 인한 공포가 우리 주위에 마치 공기처럼 둥둥 떠다닌다는 사실 자체로도 우리를 충분히 공포에 떨게 한다.
하지만 여기 무서운 사실이 몇 가지 더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우리가 언제 감시당하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공리주의자 [3]제레미 벤담은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효율적인 원형 감옥을 고안하였다. 파놉티콘은 이중으로 된 원형 감옥인데, 그 중앙에는 감시탑이 있고 주위를 둘러싼 원형건물에는 내부가 들여다 보이도록 만들어진 수용실이 있다. 파놉티콘의 핵심적인 내용은 간수는 높은 감시탑에서 죄수를 감시할 수 있지만 수용실 안에 있는 죄수는 간수가 감시하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용자들은 감시자가 없어도 (보이지 않아도) 수용자가 감시자의 부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실제로 감시자가 있을 때처럼 행동하게 되어 효율적인 감시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파놉티콘은 감시자의 입장에서 보면 효율적이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두려운 감시체제이다. 현대 사회는 “전자 파놉티콘”이라고 불릴만큼, 인터넷을 통한 사생활정보의 침해와 그를 악용한 감시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의 국가는 인터넷 관련 범죄 관리라는 명목으로 이제 개인 인터넷 사용에 까지 통제를 가하려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면, 이제 우리의 개인정보뿐만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는 사이트와 접속 시간 까지 모두 기록될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내가 쓰는 비밀 글을 보고, 내가 로그인한 사이트를 추적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인터넷은 더 이상 정보의 바다 아니라 감시의 수단으로써 작용한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또 다른 사실 한가지는, 감시 할 수 있는 경로(방법)이 이전보다 훨씬 증가했다는 것이다. 만약 조지 오웰이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 소설을 썼다면, 텔레스크린이나 순찰기, 사상경찰 따위는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이라는 가장 강력하고도 파급력 있는 (따라서 가장 공포스러운) 매체를 통해 사회 구성원들을 보다 무시무시하게 감시 할 수 있는 방법을 이용해 당시의 감시사회를 그려냈을 것이다. 고도로 발전한 인터넷 체계는 클릭 한번, 엔터 한번으로 개인의 정보를 훔칠 수 있게 해 주었다.문제는 인터넷 뿐만이 아니다. 휴대 전화 또한 감시의 매체로 둔갑했다. 올해 초, 유명 연예인의 핸드폰이 기획사에 의해 불법 복제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당사자는 자신의 핸드폰이 복제된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그녀의 사생활은 소속 기획사 측에 의해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며칠 전에는 한 남자가 내연녀의 남자 관계를 의심해 심부름 센터에 휴대전화 감청을 의뢰한 사건이 있었다. 내연녀의 휴대전화는 USIM(가입자식별모듈)칩이 장착된 최신 전화여서 휴대전화 복제를 통한 감청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심부름센터는 휴대전화 판매업자를 통해 실시간으로 내연녀의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감시할 수 있는 ID와 패스워드를 만들어 의뢰인에게 50만원에 팔았다. 결국 이 사건과 연루된 의뢰인과 알선인, 휴대전화 판매업자는 모두 불구속 입건 되었지만, 개인에 대한 감시가 너무도 쉬워졌다는 사실은 우리를 공포 속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하다. 기사화 되지 않았을 뿐, 수 많은 감시와 도청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지 새삼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공포스러운 일들에 관하여 사람들이 금방 익숙해져 버린다는 것이다. 前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으로 도마 위에 오른 주요 언론사의 불법 도청문제나, 국가정보기관의 도ㆍ감청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공포스러운 사건들을 자주 접하면서 (그래서 더 두려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매일 새로운 사건이 터지고, 또 다른 정치적 이슈가 만들어지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맞이하게 될 잠재적인 위협-감시사회의 도래-의 존재를 잊은 듯 하다. 이제 우리는 불감증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의 무신경함이 만들어낸 현대 사회의 수많은 빅 브라더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감시하며 통제하고 있다. 더 이상의 방관 (혹은 망각)은 우리를 조지 오웰의 1984년으로 데려다 놓을 것이며 전체주의의 종말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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